(단편소설) 어느 전쟁터



어제 포스팅에서 언급한 공부하다 발견한 중딩 땐지, 고딩 땐지 썼던 문제의 단편(?)입니다.
단편소설이라하기엔 역시 너무나도 짧은 분량이긴 합니다만...흐흐;;
하여간 오글오글한 느낌 때문에 약간 수정해보긴 했습니다만~ 음. 오십보백보. (야)
제목은 원본에 없었기에 대충 적었습니다. (임마!?)
...과연 그 당시의 나는 제목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런지 궁금해집니다. (왜 제목을 안썼을까)



그곳은 전쟁터였다.
사방에 피냄새가 진동했다. 수사법이 아니라 진짜로 ‘피가 강처럼 흐르는’ 탓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에 구역질을 하거나 눈살을 찌푸릴 수 없었다. 살기위해서 베고, 베고, 또 베어냈다. 아무리 힘들어도 멈출 수 없다. 아니,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내 손에는 커다란 칼이 들려있었다. (아, 언제부터 그것을 들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군)
문득 그 칼을 봤다. 피로 물든 채 이곳저곳 날이 무뎌진 처참한 몰골이었다.
갑자기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아야 하는데- 하고 말이다.
그건 정말 멍청한 일이었다!
그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목표는 지나가고 있었다. 내 옆의 동료(아, 물론 나와 같은 칼을 들고 있다)가 날 욕하는 것이 들렸다. 미안하군. 나는 지친 팔을 들어 기계처럼 목표를 베고, 자르며 방해되는 육편은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 행동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나도 많이 몰려왔다. 다른 전쟁터 같은 비명은 없었다. 그것들은 배이고 잘리면서도 한 마디의 신음도 없었고, 우리들도 멋들어진(아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지르는?) 기합 따윈 내지 못했다. 기합 따윈 사치다.
팔이 저려 와도, 어깨가 빠질 것 같아도 멈추지 못한다.
움직여야만 한다.
베어낸다!
그것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것은 옆으로 넘어졌- 아니, ‘스윽’ 하고 옆으로 밀려난 것 같다. 밀려난 그것은 내 동료의 앞으로 가 있었다. 동료가 움직였다.
썬다!
내 동료의 칼에 의해 그것은 다시 더 작은 토막으로 변했다.
반복.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벤다, 썬다....... 썬다........ 썰자........ 자른다?

생각이 끊어졌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단백질로 된 정교한 마리오네트.
단백질로 된 마리오네트. 마리오네트.
관절은 삐걱삐걱. 손목은 후들후들. 손가락은 욱신욱신.
그래도 멈추면 안 돼.
여기는 전쟁터니까.
자, 종료 10분 전.
시계를 보렴.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칼을 휘두르자.
종료…? 10분 전……?

서서히 생각과 의지가 돌아온다.
마리오네트에서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간신히 기억해냈다. 동시에 팔 전체에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의식을 하니 고기를 자르는 속도가 줄고, 힘이 빠진다.
그러나 컨베이어 벨트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벨트 위의 고기가 빠르게 지나쳤다. 힘에 겨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힘차기 짝이 없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탓인지 바로 옆인데도 맥 빠지는 목소리였다.
“이봐, 이제 10분 남았어, 조금만 더 참으라고.”
왠지 나에게 욕이라도 하고 싶은 듯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힘도 바닥난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대답 없이 할 일을 계속했다. 고기를 자르기 위해 팔을 들고, 내려 찍-으려 했다. 하지만 손에 남은 힘은 백지장을 들기에도 부족했는지 커다란 칼을 지탱하지 못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느려졌다. 아니, 그렇게 느끼기만 하는 걸까? 문득 바보 같은 생각이 또 떠올랐다. -이거, 그러니까,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다.
떨어지는 칼이 컨베이어 벨트의 중간에 맞고 튕겨 나온다.
그것이 천천히 내 허벅지를 파고 들어간다. 왠지 익숙한 소리인데. 고기, 자르는, 소리? 에이, 환청이겠지.
내 눈은 천장을 바라본다.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야에 붉은 분수 같은 게 보인다.
붉은 바다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인가 보다.
오-
나에게도 기적이 있기를.

핏물 속에 쓰러진 남자는 곧 의무실로 실려 갔다. 그 직후 작업반장이 목격자들을 모아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일은 마무한테도 말하지 마! 어디 나불대면 해고다! 알겠어!?”
잠시 후 작업반장은 일지에 무언가 적었다.
<오늘 안전사고는 없었음. 도축 목표량 300% 초과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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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가축 도축의 실태를 보여준 책을 읽고 썼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 어딘가의 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실제로 저런 식으로 무리한 도축 작업을 강요하다 일어난 사고가 은폐되곤 한다는 거지요.

by 풀잎열매 | 2009/10/24 20:15 | 망상수해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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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붉은박쥐 at 2009/10/24 20:44
음, 도축이란 건 절대 할만한 직업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거, 나스 키노코 씨 작품에 빠져있었을 때 쓴 글인가요....?
Commented by 풀잎열매 at 2009/10/27 17:31
붉은박쥐 님// 잘 기억은 안나지만...아마 접하긴 했던 때일겁니다. 영향은 있었을 겁니다. (사실 자필 원본 쪽이 더 반복은 적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런 식의 연출이 나스 식으로 유명해졌지만 딱히 전유물은 아니라고 여기긴 합니다만;;
Commented by draco21 at 2009/10/26 19:52
쿨럭.. OTL 가벼운 반전이 압권이군요. ^^:
Commented by 풀잎열매 at 2009/10/27 17:31
draco21 님// 노렸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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